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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여행 - 이기대 도시자연공원, 몰운대
    여행가는 달 2023. 6. 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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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대 도시자연공원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d09f7fb6-47a7-40ea-9ebe-a2bf3362e0c9&big_category=A01&mid_category=A0101&big_area=6 

     

    이기대 (부산 국가지질공원)> 여행지 :대한민국 구석구석

    이기대 (부산 국가지질공원)

    korean.visitkorea.or.kr

    이기대 공원 산책로에 드러난 유천층군 안산암질 화산각력암(Kanb)

    남구 용호동에 위치한 이기대 도시자연공원은 약 8~7천만 년 전 유천층군 화산활동의 결과물인 안산암질의 화산암류 안산암질 화산각력암(Kanb)와 응회질퇴적암이 넓게 분포하고 있어, 한반도 남동부의 백악기 말 화산활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다. 이기대 전역에 폭넓게 분포하는 유천층군 화산암류는 안산암질 화산각력암, 응회각력암, 응회암 그리고 용암류 등의 다양한 화산암들로 이루어져 있다

     

    몰운대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cebe9420-ec52-429b-81d8-d73e5ba65948&big_category=A01&mid_category=A0101&big_area=6 

     

    몰운대 (부산 국가지질공원)> 여행지 :대한민국 구석구석

    몰운대 (부산 국가지질공원)

    korean.visitkorea.or.kr

    몰운대 (沒雲臺)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  낙동강  하구의 가장 남쪽에서 바다와 맞닿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몰운대는 낙동강 하구의 가장 남쪽에서 바다와 맞닿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까지는 몰운대라는 섬이 있었으나, 그후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가 쌓여 다대포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지형상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안개와 구름에 잠겨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몰운대(沒雲臺)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대포와 몰운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서 임진왜란(1592) 때에는 격전이 벌어졌으며, 이순신의 선봉장이었던 충장공 정운도 이 앞 바다에서 500여 척의 왜선을 맞아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는 등 역사의 한 장면이 연출된 곳이기도 하다. 정운의 순국을 기리기 위한 사당과 비석이 있는 이 곳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 Busan Metropolitan City)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 영어: Busan Metropolitan City)는 대한민국 동남부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한민국의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해양(항구) 도시이며, 부산항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과 물류 산업이 발달하였다. 일본과는 대한해협과 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연제구 연산동이며, 행정구역은 15구 1군이다.

    역사
    부산 지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했다. 삼한시대에는 지금의 동래나 남구 등지에는 "거칠산국"이, 기장, 해운대 등지에는 "장산국", "내산국"이 있었고 서면이나 남포동 등지에는 "가락국" 등의 부족국가가 있었다. 그러다 삼국시대 신라는 서기 1세기 후반인 탈해 이사금 때에 기장의 장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하게 된다.

    부산포 일대에는 가야의 종발성이 세워져 신라와 가야의 각축장이 되었다. 내물왕 대인 서기 400년경에 가야가 신라를 침공했다가 광개토태왕의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패망하자 부산 전역이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옛 거칠산국은 거칠산군이 되고 종발성은 "큰 시루"라는 뜻의 대증현(大甑縣)이 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 경덕왕에 의한 행정개편으로 거칠산군은 양주(현재 양산시) 소속의 동래군으로 개칭되었다. 대증현은 동평현(東平縣)으로 개명되어 기장현(機張縣)과 함께 동래군의 관할현이 되었다.

    《대동여지도》의 동래·기장과 그 주변
    고려시대인 1018년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격하되고 울주의 속현이 되며 동래군의 속현이던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속현이 되었다. 1397년 동래군에 진이 설치되었다. 1405년 울주의 속현이었던 동래현이 독립현이 되고 양주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이 동래의 속현이 되었다. 15세기 전반까지 부산은 ‘부산포’로 불렸다. 동래는 1547년 동래도호부로 승격이 되었다. 1592년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을 동래부 남촌면(현재 수영동)으로 옮겼다. 9월1일 이순신이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후에는 부산진이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로 활용되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에 의해 조선이 강제 개항되었을 때, 인천, 원산과 함께 개항되었고, 왜관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부산은 1877년 1월 《부산구거류지약조》의 체결로 일본이 일본인들의 보호관리 및 통상사무의 관장을 위해 관리관을 파견하면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1880년, 일본은 영사관을 정식으로 설치하고 일본 거류지를 사실상의 일본 영토처럼 만들어 버렸다. 일본은 일본인 가구가 200여 호밖에 안 되던 때부터 장기적으로 도로망을 계획하고 가옥 구조를 규제했으며, 1880년대에 일본은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까지 모두 마치고 식민 통치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부산은 개항 후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일본의 도시처럼 변했고 소수의 일본인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도시로 되어갔다.[2]1895년 6월 23일(음력 윤 5월 1일) 동래부(東萊府) 동래군이 되었고, 이듬해 1896년 8월 4일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부산항이 무역항으로 정비되면서 항구도시로써 발전하게 된다. 1905년에는 경부선이 개통함과 함께 부산역이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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